그 속에 숨겨진 다양함, 소설과 독자, 삶에 대하여

<백수생활백서>에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책만 읽어대는 스물여덟 살의 서연이라는 여자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오래전 나는 쇼핑몰에 있는 카트를 끌고 서점의 책들을 쓸어담는 것이 꿈이었다...(중략)...그러나 끝내는 재빠르게, 한 시간 남짓 카트 하나를 책으로 가득 채워 계산을 하고 차 트렁크를 책으로 꽈악 채우고서 예정된 곳으로 떠나는 일을 꼭 한 번 해보고 싶었다.’라고 이야기하는 책 편력가인 자발적 백수 이야기. 그 이야기는 기묘하고도 흥미롭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이 너무나도 부러웠으니 나 역시도‘백수’의 삶을 꿈꾸고 있나보다. 어쩌면 이 책은 아침마다 어딘가를 가야하는 이들에게 조금은 위험한 책일런지도 모르겠다. 당장에 그 일상에서 벗어나버리고 싶은 욕망을 일깨울지도 모를테니 말이다.
특별히 소설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박주영 작가는 문학을 전공한 이가 아니다.‘대중문화의 정체성’이라는 졸업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자료조사를 하던 중‘상상’출판사에서 장편소설 공모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그저 책을 너무 좋아했었다. 따로 습작을 함도 없이 1년에 한 편씩 세 편의 장편소설을 썼다. 겁도 없이 그녀는 장편소설을 한 편씩 완성했단다.
특별히 소설가를 꿈꾸지는 않았다. 그저 소설을 좋아해서 자신의 책이 한권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그런데 하다 보니까 소설가가 되고 싶더라고요.”
사실 소설가가 되기까지는 남편의 몫이 컸다. 결혼 후 한 번 소설을 써보는 것이 어떻겠냐는 남편의 권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가 결혼 선물로 사 준 근사한 엔틱풍의 책상 앞에 앉았던 거였다. 심지어는 신춘문예의 공모 시기도 몰랐다던 그녀, 써두었던 장편소설을 중편으로 손보아 공모했다. 주변에 글 쓰는 이 하나 없이 혼자서 씩씩하게 작가의 길에 첫발을 내딛었다. 그렇게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 후 6월 즈음하여 <백수생활백서>의 600매 분량 초고를 완성했다. 이 책의 특이한 점 중의 하나인 수많은 인용구문들을 제외한 것이 600매 분량이었다. 그녀가 처음부터 쓰고자 했던 소설을 위하여 그녀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나아가고 있었다. 처음부터 다양한 인용 구문을 넣어보자고 생각했단다. 그리고 이러한 캐릭터를 만들어보고자 구상했었단다. 너무너무 책을 좋아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말이다. 처음에 주인공 여자의 직업을 무엇으로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한 것이 책을 많이 접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고 결정하고, 도서관 사서, 헌책방 주인에서 서평담당 기자까지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하지만 오로지 책만을 파고드는 인물을 위해서라면 백수가 가장 좋을 것이라 판단했단다.“그런데 난 회사에 다녀본 적이 없어요. 아침에 매일 어디를 가야한다는 거 싫어해요.(웃음) 그래서 백수라는 캐릭터가 가장 편했죠.”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자면 그녀는 사람들이 직업을 선택하면서‘어떤 직업이 돈을 더 많이 받나’를 생각하는 것이 불만이었단다. 그래서 더욱‘백수’라는 캐릭터를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그런데 그녀의 의도가 독자들에게 먹혔다. 작품을 읽으면서 서연의 삶이 너무도 부러웠던 나 같은 독자가 있으니 말이다.‘싫은 일을 하면서 인생을 소비할 필요는 없다’는 서연의 생각이 자꾸 나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있었다.
그녀 역시 소설가로 등단하기 전까지 백수였단다. 지금도 소설을 쓰지 않는 동안은 백수의 생활을 살고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사이 수많은 책들을 읽어댔다. 그녀가 읽은 수많은 책들이 있었기에 또<백수생활백서>라는 소설 속에 수많은 책들의 이야기가 존재할 수 있었던 거다.
책을 읽으면 그것은 고스란히 내 것이 된다

소설 속의 주인공 서연은‘현재로서는 책이 나를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고 살고 싶게 만든다는 것밖에는 알지 못한다.’고 단정 지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 박주영 작가 당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 서연처럼 책은 아닌가라고 물었다.“사실 등단하기 전에는 일 년에 2~300권의 책을 읽었어요. 그리고 읽은 책들에 대한 독서카드를 만들었죠. 만약에 내가 유명한 작가였다면 독서노트를 냈을 거예요.”
그래서일까. 소설에는 수많은 책들의 인용구문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그녀에게 첫 번째 태클을 걸어본다. 이 같은 장치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던 것이었을까? 물론 다양한 인용구문들로 독자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공감을 얻어내고 있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어찌 보면 쉬운 길을 택한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처음에는 사실 고민도 많았어요. 소설로 인정이 될까라는 고민이었죠. 될 것도 같고, 안될 것도 같고...(웃음)그래서 이왕에 할 거면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에서 인용구문을 가져오자는 생각을 했죠.”이어지는 두 번째 태클은 제목에 대한 것이었다. 어느 기자는 이 책이 백서라기보다는 선언에 가깝다고 표현했다.<백수생활백서>라니 어느 광고의 인용이기라도 한 것인가. 제목은 작가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인가 물었다. 사실 책을 읽다보면 이런 제목을 지을 작가로 생각되지는 않았다.“원래 제가 생각한 제목은<탐험과 소유>였어요.‘소설은 모험이다’라는 취지였달까요. 그리고 독자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것을 소유하게 되잖아요. 소유라는 단어에는 그 의미를 담은 거죠. 책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책을 읽으면 내 책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약간의 마찰이 있었죠.<백수생활백서>라는 제목이 너무 시대에 따라가는 거 같아서...”
현재 다른 소설을 쓰는 게 있는데 지금은 거의 반백수의 상태란다. 지금의 소설 이미지가 고정화되어 버릴까 두려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녀는 사건이나 반전보다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조용히 하고 싶단다.“특별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살다보면 정말 나쁜 일들도 많이 일어나지만 무난하게 큰 사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지 않나요? 그런 얘기들을 쓰고 싶어요.”그녀의 백수 생활, 여전히 책 읽는 시간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하고 싶은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사실은 백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소설 속의 두 명의 여자, 서연과 유희. 책 읽는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 라는 이유를 들며 고정적으로 일하기를 포기한 주인공 서연과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 유희. 유희는 특별히 마음 먹지 않아도 모든 것이 너무도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지독한 영화광이다. 그러던 어느 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소설가가 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리고 서연에게 자신의 소설을 읽어달라고 부탁한다. 책 편력가인 서연과 소설가가 되는 유희. 둘은 다른 듯 너무도 닮아 있다.“사실 저에게 서연과 유희는 흡사 쌍둥이와 같은 존재들이에요. 원래대로라면 책 읽기를 너무도 좋아하는 서연이 소설을 써야했겠지만 독자 없이는 작가가 존재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어요. 만약에 이 이야기가 영화로 만들어졌다면 여 주인공 한 명이 두 사람의 역할을 하게 했을 거예요.”
이 소설은 백수라는 단어가 힘을 발휘하여 오늘 날의 젊은 백수들의 삶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단지 표면상의 모습일 뿐이다. 사실은 책에 대하여 그것이 가지는 무한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무한의 세계를 헤엄치는 여자 주인공에 대하여 그리고 그가 이야기하는 삶에 대하여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소설과 독자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자칫 고리타분한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요소에 대하여 흥미진진하게 풀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서연이 책에 대한 신뢰를 강조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비단 소설에 대하여 그것을 읽는 행위에 대하여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서른 살 무렵의 여자들이 가지는 삶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방황에 대하여 작가는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난 소설이 좋다. 읽는 사람마다 다른 것을 읽어낼 수도 있는 무궁무진함이 좋다. 살아보지 못한 삶을 마치 살아본 것처럼 여기게 만드는 그 힘이 좋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서 소설을 썼다
작가의 말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책을 소유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식은 그것을 쓰는 것이라고 발터 베냐민은 썼다. 나는 책을 소유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이 소설에는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것들이 아주 많이 포함되었다. 쓰면서도 읽는 것이 더 즐거울 때가 많았다. 하지만 읽는 것보다 쓰는 것에는 더 많은 자유가 있었고, 나는 그 자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나는 읽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느낌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다.’고 말이다. 좀 더 자세히 들어보고 싶다. 소유하기 위해서 책을 썼다는 것에 대해서.“사실 책이 비싸지는 않아요. 하지만 되도록 진짜 사고 싶은 책만 사야지... 라는 생각을 해요. 공간을 너무 많이 차지하거든요. 책장이 있어야 할 공간도 필요하고 무겁기는 또 얼마나 무거워요. 읽은 책이 쌓이다 보니 짐이 되는 순간이 있더라구요. 생각해보았죠. 만약에 우리 집에 불이 난다든지 무인도로 떠나야 한다면 어떤 책을 가지고 나와야 하나 고민했죠. 그래서 책을 썼어요.”
그렇다면 집에 불이 나면 당신은 당신 소설만 들고 나오겠군요?“(웃음)네.”
나는 한 때 백수였고, 지금도 백수이다

그녀의 지론에 따르면 인생에는 선택의 폭이 참 다양하다. 단지‘돈’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별로라는 그녀의 순수함이 현재 그녀가 소설을 쓸 수 있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그녀의 순수함에 감동하여 다음에 준비하고 있는 소설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해진다. 현재 퇴고만 남은 그녀의 다음 소설은‘요리하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귀띔을 해주었다. 누군가가 그녀에게 조언을 해주었다고 한다. 나이가 더 들면 젊은 여자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 힘들어지는 순간이 있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더 나이가 들기 전에 그들의 이야기를 먼저 세상에 내놓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책들의 운명 그리고 박주영 작가의 운명
소설 속에‘책들의 운명’이라는 단어를 보고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그 동안 내가 읽어왔던 책들이 나의 인생을 알게 모르게 변화시키고 잠식해 나갔던 것을 깨달은 것일까? 아니면 그들에게 운명이 있었다는 당연한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이유에서였을까? 아마 두 가지 다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책들의 운명, 그리고 당신의 소설<백수생활백서>의 운명에 대하여 들어보자.“음... 저는 많이 사랑받을 거 같아요.(웃음) 제 첫 번째 욕심이라면 제가 사랑할 수 있는 책을 써보자는 것이었기 때문에 우선은 나쁘지 않아요. 사실 지금까지 소설을 쓰면서 주변의 어느 누구에게도 모니터를 부탁한 적이 없어요. 공모전의 본심에 오르면서 심사의원들이 써주었던 평이 전부였죠. 그래서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몰라요. 그들이 어떻게 제 소설을 받아들이고 있을지 궁금하기는 해요.”
신인작가와의 만남은 수십 년간 글을 써온 작가와의 만남과는 또 다른 신선함이 준비되어 있었다. 책읽기를 너무 좋아하는 박주영 작가,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 대하여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듯한 그녀가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쓰게 될지 궁금하다.
개인적인 고백을 하자면 나는 아직 글자도 모르던 꼬맹이 시절부터 책이 참으로 좋았다. 엄마가 사주신 동화책 전집을 보면서 왜 그리 마음이 뿌듯했었던지. 아침에 눈을 뜨면 책장에서 백설공주니 이솝우화 같은 동화책을 꺼내 들고 책장을 넘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글씨도 모르는 어린 소녀가 책 읽는 모습이 좋았었던지 부모님은 어느 날 조그만 책상을 선물해 주셨다. 세상을 모르는 소녀는 책이 알려주는 무한의 세계가 좋았던 것이다. 종이의 질감이 좋았고 넘길 때마다 내는 소리가 좋았고 심지어는 잉크냄새마저도 좋았다. 책이 너무 좋아서 가슴이 두근거릴 때도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너무 마음에 드는 책을 발견하면 끝까지 읽는 것조차 아까워서 천천히 아껴 읽는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상에 치여서 그 기쁨의 색이 조금 바래어가고 있었다. 박주영 작가의<백수생활백서>가 바래져가는 책 읽는 기쁨에 선명한 색을 칠해주었다. 조금 고마운 마음이 생겨난다.NP
임보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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