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남자를 만나기 위해 먼길을 나섰다. 옛 가야 땅 고성. 그곳엔 춤추는 남자들이 있다. 그 남자가 그리웠다. 농사꾼이지만 춤꾼은 아니었던 내 아비는 유독 곱사춤을 잘 추었다. 동네잔치마당에서 당신을 보는 일은 쓸쓸했다. 그건 춤이라기보다는 하소연이었고 넘쳐흐르는 고독이었고 무게를 내려놓고 싶은 걱정 같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웃음과 울음이 섞인 듯한 그 얽히고 설킨 몸짓이 단지 절망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사지멀쩡한 내 아비가 왜 세칭 그 병신춤에 매력을 느꼈는지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훗날 칠레의 민중가수 빅토르 하라(Victor jara)가 부른 힘찬 노래, 농부의 기도(Plegaria a un lab-rador)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된다.‘강의 흐름을 듣는 너, 영혼에 날개짓의 씨를 뿌린 너, 일어나 저 산을 보라... 바닥에 엎드려 있던 모든 것이 일어설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을 받았고 아비들의 그 몸짓의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춤은 삶과 인간성을 용감하게 긍정하는 것.‘인생이여 고마워요’라는 뜻이 아닐까. 이 땅에서 아비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남자의 춤은 무엇일까라는 질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쓸쓸하면 쓸쓸한 대로, 춤은 살아가는 것 그 자체라는 것을. 그러나 지금 이 땅의 아비들은 더 이상 춤을 추지 않는다. 춤추지 않는 아비는 숨을 쉬지 않는 것 같다. 자고로 “사내 몸이 춤 없이 멋이 되는가” 이 견해에 동의한다. 허기인지 보고픔인지 이 땅의 아비들이 마당 한가운데로 나와 춤을 추었으면 좋겠다. 그 간절한 신화를 간직한 춤꾼, 고성오광대의 이윤석 씨는 그래서 이 땅의 대표 아비다. 그래서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좀 늦은 감이 있지만 몹시 비장한 길임에 틀림없다.

명무(名舞)의 전설을 짚는 덧배기춤

“춤꾼이라니요, 농사꾼이죠. 우짜다 추게 되었죠. 고성오광대를 전하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고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할 수 없는 일이 아니니까. 고성오광대는 우선 지역민들과 함께 숨을 쉬어야 해요. 그러려면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개인의 살아가는 모습이 곧 춤이거든요.” 뭐든 그냥하는 사람은 열심히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고, 열심히 하는 사람은 즐겨서 하는사람을 당할 수 없고, 즐겨서 하는 사람은 미쳐서 하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 하지 않았나. 그 역시 ‘장이’라는 말보다‘광((狂)’ 이라는 말에 자신을 건 사람이었다.
이윤석 씨는 농사가 직업인 사람이니 농사꾼이고, 중요무형문화재 7호인 고성오광대보존회 회장(고성오광대 예능보유자 후보)이며 매주 월요일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연희과에서 <연희 실기> 탈춤을 가르치고 있는 선생이기도 하다. 끝끝내 춤꾼이라 칭하는 것을 거북스럽게 여겼던 그는 그저 춤을 불러내는 농사꾼 정도로 불리길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자꾸 ‘들녘’에서 그를 불러내 무대 위에 세우려 애쓰고 있는 중이다.  그는 요즘 특히 덧배기춤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1998년 CID세계무용축제 공연에서 그에 의해 발표된 이래 누차 명무전에 초청되었다. 덧배기춤은 즉흥춤이다. 이윤석 씨의 표현대로라면 범벅이랄까.“덧배기춤은 절대 리허설이 있을 수 없습니다. 또 기분에 따라 어떻게 나아갈지 저 자신도 모르지요. 전 농사꾼이니까 자연스러운 농심이 녹아 있는 게 아닐는지요. 그저 순수하게 몸이 가는 대로 내버려 둡니다. 장단에 실려 그저 뛰노는 거지요.”
덧배기란 경상도식 자진모리 장단을 일컫는 이름이다. 고성 지역의 남자들이 마당에서 추는 활달한 춤을 ‘덧배기춤’이라고 부른다. 특별한 순서나 격식은 없이 춘다하여 어떤 이는 허튼 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성의 ‘덧배기춤’은 중요무형문화재 제7호 ‘고성놀이’ 속 특별한 춤사위가 만나 덧대어졌다 할까. 그의 덧배기춤에는 스승 조용배 씨와 허종복 씨의 가락이 배어 있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무용평론가 진옥섭 씨는 지난 3월 8일 LG아트센터에서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이라는 공연 후에 그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이윤석의 <덧배기춤>은 <고성오광대놀이>에 나오는 춤사위들을 즉흥적으로 엮어 추는데 굵직한 몸집의 볼품을 충분히 활용하여 굵게 매듭지어 내는 것이 일품이다. 주목할 것은 하 단위의 동작 도중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하는 점일 것이다. 가령 손을 든다 했을 때 올라가 정점을 맺을 때는 의식이 있지만 내려오는 것은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붓의 필법처럼 에너지의 농담이 정확히 드러나 원근과 여백을 주는 것이다. 그간 우리는 탈춤을 탁배기 사발과 멍석판, 그리고 검증 못한 ‘신명론’으로만 설명해 왔다. 그러나 이윤석의 춤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때가 되면 솟구쳐 배기며 교묘히 풀어 나온다. 탈판 역시 도제적인 춤 수업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럴쯤 탈춤이란 것. 비록 탈에 가려져 지금 그 사람들 이름은 잊었지만 대대로 명무(名舞)의 전설을 간직해 온 ‘춤의 결사(結社)인 것이다.’
진옥섭 씨는 그를 두고 명무의 전설을 간직해 온 춤의 결사라 칭했지만 이윤석 씨 자신은 주로 ‘짚는다’는 표현을 더 자주 사용하고 있다.
“내 춤이 타고난 천부적 소질에는 못 미치지만 30여 년 연륜 속에서 자연스럽게 익혀진 것이에요. 현란한 재미보다는 고요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게 만약 그런 능력이 있다면 제 몸짓을 보고 중심을 잡고 설 수 있는 마음을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절정을 향해 치닫는 그의 팔을 위 아래로 흔들거나 오른발 왼발을 사뿐사뿐 들었다 놓았다하는 걸 보면 그 안에 사나이다운 끈기와 여인네 발걸음에서 느낄 수 있는 고요가 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심장을 두드린다. 또 장신의 그가 흰옷을 입고 너울대는 모습에서 그 옛날 처용을 떠올리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처용의 춤이 그렇듯 그의 무(舞)에서도 예전의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의식무(  邪儀式舞)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크고 활달한 몸짓이 뛰다가 급작스럽게 주저앉는 ‘배김새’ 동작은 시원하고, 감았다가 일어나며 푸는 동작들은 마음에 하늘을 들여놓게 한다.

춤은 그리움의 다른 이름

그는 75년 5월 제대 후 고성오광대에 입문한다. 그때만 해도 천한 쟁이들이라 손가락질을 받았던 힘든 시절이었다. 그가 춤을 만난 건 어린 시절부터 보고 듣고 따라하면서 선택한 길이라면 이곳에서 만난 두 분 스승은 어쩜 운명이었다.
조용배(1929-1991) 씨는 조한량이라고 하면 고성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자유롭게 산 분이었다. 고성은 그를 두고 쓰자 하면 초서, 치자하면 매난국죽, 대마하면 단소, 쳐라하면 춤을 내놓았던 최고의 풍류객으로 기억한다.   허종복(1930-1995) 씨도 만만치 않아 ‘온 만산에 피’라는 별명을 얹고 산 분이라 한다. 논에 피는 뽑지 않고 춤판에 매달려 농사일과 춤일을 왔다갔다 했다는데 이윤석 씨가 이 두분 스승의 기량을 물려받았다. “조용배 선생님은 단신이었지만 묵직한 춤을 내놓은 분이셨어요. 잡기에 능해 자지러질 것 같은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팔 한자락을 펼쳐 걸어가지만 그 안에는 모든 자질구레한 의미는 사라집니다. 함축적인 그 몸짓은 자잘함이 필요없는 몸짓이었지요. 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한편 허종복 선생님은 좀더 아름다운 동작을 만들어낼 줄 아시는 분이었습니다. 참 예쁘지요. 무념의 경지에 참 잘 추신다고 할까요. 두 분은 춤에 미친 사람들이었어요”
두 분 스승의 춤이 다르듯 퍽이나 다른 인생을 살았다. 그는 “두 분 스승의 고뇌 속에서 고성오광대가 이어졌습니다. 저도 그럴 것이고 춤과 생활에서 완벽함을 조화시키는 것이 후회없는 삶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용배 선생님은 모두가 흠모하고 칭송하는 예인이었습니다만 가까이 모신 저로서는 그 삶을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모자람이 있더라도 가족 속에서 남편, 아버지로서의 우선되는 삶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종복 선생님을 모시면서 생긴 좌우명이 밖의 평가만큼 가정에 충실하자였습니다. 큰 대가는 못 이룰지라도 양쪽 모두에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큰 마당이건 작은 마당이건 준비하는 마음이야 늘 같지만 특히 미국 무대에 섰을 때 스승 허종복 선생님 생각에 끝내 눈물이 터졌다 한다. 그 때 KBS 국악마당팀도 함께 갔었다.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던 중에 울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집안과 지역에서 광대라고 손가락질을 받았던 두 분 스승이 지금 계셨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혹 그 힘들게 엮어낸 열매를 너무 쉽게 따먹는 게 아닌가 하는 자책감도 들었다 한다. 그의 스승에 대한 기억 한쪽엔 늘 이런 눈물이 묻어 있다. 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흐르던 때는 1995년 1월 대학생 전수 기간 때였다. 위암으로 오랜 투병생활 속에 있었지만 허종복 선생님은 춤을 추고 싶어하셨다. 한참 몰아갔을 춤을 잠시 멈추고 허리춤을 졸라 멨다. 그때 스승은 “나는 지금 석양에 지는 해고 총무(이윤석 씨)는 돋아나는 해와 같다. 고성오광대는 변함없이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토록 당당했던 모습이 허무함으로 가슴이 미어지던 순간이었다. 차마 다 듣지 못하고 전수관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스승은 그가 ‘삐꼈는’ 줄 아셨다 한다. 30명의 패를 이끌고 탈판을 벌이는 모갑이(보존회장)의 짐 때문인 줄 아셨던지. 조용배, 허종복, 이윤석으로 이어지고 있는 고성오광대의 대표적인 말뚝이춤에는 세대를 초월한 존경과 사랑이 담겨 있었다.
고성오광대에 대한 기록은 백 년전 오흥묵이라는 원님이 쓴 <고성총쇄록(固城叢鎖錄)>과 중종 25년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의 고성현조(固城縣條)에 있는 가무백희(歌舞百戱)에 드러나고 있다. 고성오광대는 주제가 다른 오락성이 강한 다섯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오방신장무나 사자무 같은 벽사진경의 신앙적인 의식무가 없다. 천형을 안고 살아가는 문둥이가 삶의 고통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을 북춤으로 표현한 <문둥광대마당>, 양반의 횡포와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내용인 <양반마당>,  영노라고 하는 상상의 동물인 비비를 등장시켜 양반을 위협하고 조롱하는 <비비마당>,  수도승이 세속의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파계하는 과정을 재담없이 묘사하고 있는 <승무마당> 처첩간의 갈등을 묘사하면서 봉건적 가치관에 대한 비판의식을 담아내고 있는 <제밀주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사보다는 사실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춤 위주로 된 탈놀이로 근대사회 당시의 시대인식이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고성의 문화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제2과장 양반과장에 나와 양반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하인 말뚝이다. 말뚝이 춤에는 고성을 대표하는 춤사위가 들어있다. 말을 다스리는 긴 채찍을 휘두르면서 추는 활달한 춤사위는 양반을 줄곧 공격하지만 더 깊은 춤의 본질을 유추해내기도 한다.  고성오광대의 해학적 흐름과 양반 모순을 비판하는 내용은 오늘에 와서 민주화와 사회적 모순을 이야기하는 메시지로 읽히기도 했지만, 저항이라기보다는 조화에 더 의미를 두고 있다.

100년을 이어온 춤, 앞으로는

고성오광대가 100여년을 이어올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그건 그리움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제게 춤은 그리움이랄까. 춤이 그 순간순간 그립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것. 그런 것이어야 해요. ” 그는 요즘 들어 춤을 춘다는 사실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도 더러 한다. 춤은 부둥켜 안고 어울려야 하는 게 진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가지 않고 학교에 나가고 하는 것들 말이다. 춤을 추라고 무대에 세워놓는 것만큼 그에게 멋쩍은 일은 없다.
그는 여전히 농사꾼이다. 올해는 벼농사도 벼농사지만 토마토 8만주를 관리해야 한다. 새벽 5시에 일을 시작해 해가 지고도 한참인 저녁 11시까지 고된 일은 이어진다. 새벽이면 트럭을 몰고 마산청과시장에도 나가봐야 한다. 토마토는 대략 8월에 파종하고 12월말부터 수확기에 들어가지만 그 사이 순을 제거하거나 꽃 수정을 일일이 손으로 해야 할만큼 정성을 쏟아야 하고 온도에 민감하기 때문에 비닐하우스 지붕에 이불(?)도 씌워야 하고 일이야 끝이 없다.
보존회원 여럿도 사정은 같다. 바쁜 농번기에 일하다 말고 달려와야 한다. 100여년을 이렇게 이어 왔다 하지만 앞으로 전승문제는 그를‘고뇌’속에 몰아넣는 문제이기도 하다. 고성오광대는 미국 워싱턴, 케네디, 뉴욕, LA, 산디아고 6개 도시 공연장 등 가는 데마다 200-300명이 무대 위로 올라 올만큼 환호를 받았지만 살림살이는 여전히 곤궁하다. 문화재청에서 월 80만원 고성군에서 30만원이 나온다. 예산을 절감하기 위해 숙박비와 식비를 최대한 아끼고 공연비 20%는 반드시 적립한다. 간사와 사무국장에게는 월급도 나가야 한다. 회원들에게 베풀고 싶지만 기껏해야 2-3만원씩 돌아가는 날도 있고 아니면 밥이나 먹고 헤어지는 정도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회원들은 반드시 생계수단이 있어야 한다.
“대학동아리에서 활동하다가 학교졸업 후에 입회하기도 하고 지금 3세대는 우리 시대와는 분명다르지요. 평소에 화합과 어울림을 강조하고 세대간의 차이를 극복하고 정신적인 부분을 강조하지만 역시 경제적 바탕을 어떻게 해야 하는 점은 여전히 고민거리입니다.”  고성오광대 전승이라는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 위에 척 얹혀 있지만 그가 입문하던 그 시기와 사정은 많이 다르고 더더구나 물질적인 고통을 모르는 세대에게 ‘전승이라는 책임을 들어’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1974년부터 대학생들에게 춤 전수를 하기 시작했죠. 1년에 1500명이 다녀가고 올해는 재독교포2세 5-6명과 미국교포 5-6명이 전수회관에 옵니다. 우리 문화를 누릴 수 있는 동기를 만들어줘야 한다는 목적으로 정림종합건설 문화산업지원으로 이루어집니다. 우리나라 기업은 유난히 전통문화에 대한 메세나(기업의 문화예술후원)에 인색하지요. 좀더 폭넓은 관심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전통문화는 역사와 미래 사이의 정신적 관계를 맺는 또 다른 방법이다. 이제 이윤석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상징이다. 오직 농사를 짓는 마음과 몸짓 하나로 이 땅 일하는 아비의 고난에 찬 삶을 온 몸으로 노래하고 있지 않은가. 멀리 있다는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지역사회 속에서 관심을 이끌어 내기 위해 노력하고 해외 공연도 부지런히 다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와이주립대에서 53일 머물면서 2주 동안 학생들을 지도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만난 주디 반자일 교수가 고성에 다녀갔어요. 자연경관이 빼어남은 물론 사람과 사람이 만나 믿음을 주고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가. 직접 보고 싶다는 게 이유였어요. 더욱더 삶의 참됨과 관계맺음에 대한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아마도 농사꾼이 아니라 춤만 추었다면 전 망가졌을지도 모르지요. 만약 무대에만 섰다면 꾸밈과 위선을 가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의 춤에는 흙냄새가 난다고 한다. 그것은 그가 기다리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 작은 걸 지어놓고 큰 게 나오길 기다리는 일은 더구나 없다. 그 성실성이 그의 춤의 핵심이었다.

인간성의 진정한 기준

“인간의 삶에서 자신을 위해 자유를 얼마나 획득할 수 있는가. 인간성의 진정한 기준을 둔다면, 집시들이야말로 진정한 인간, 롬(Rom)이다... 그들이 자유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적인 선택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
<행복한 집시를 만났네 (I Even Met Happy Gypsie )를 만든 알렉산다르 페트로비치(Aleksandar Petrovici)는 집시들을 이렇게 말했다. 이윤석 씨와 고성오광대 식구들을 보면서 필자도 감히 ‘인간성의 진정한 기준’에 대해 곱씹게 되었다.
그들이 보여주는 시적인 서정성과 위트와 해학은 힘이 세다. 삶에서 춤은 조화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을 표출하고 있다. 그리고 이 본질적인 물음을 통해 우리는 순간순간 자유로워진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마을마다 잔치를 하지 않았나. 온 천지가 축제장이었다. 장구치고 놀고, 작은무리는 큰 무리에 합류하고 신명을 얻었다...” 고성을 떠나는 길은 내 아비를 떠나는 것만큼이나 애잔했다. 아비들이여 다시 한번 그 춤을. N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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