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가족들과 된장찌개가 맛있는 고깃집에 갔다가 메주를 담그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내가 늙으면 우선 도시의 집을 팔아 텃밭이 자그마한 시골집으로 옮겨가서 텃밭 가득 콩씨를 뿌리고 싶다고, 여름이면 콩잎을 솎아 된장에 쪄서 먹고 가을이 오면 누런 콩잎에 젓갈을 넣어 삭히며 가을이 깊어지는 어느 날에는 말라붙은 콩깍지에서 희디흰 콩을 골라내 아궁이에 불을 붙여 콩이 무를 때까지 삶아낸 후 구수한 김이 오르는 가마솥을 열고 무른 콩을 절구에 찌어 둥근 메주를 매달면 한 해가 저물어 갈 것이고. 날이 차가워질 무렵 처마 밑에 주렁주렁 매달린 메주를 보면 나는 어쩌면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공지영 소설「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중에서)
TV를 보는데 우리의 음식을 너무도 맛깔스럽게 표현하는 이가 있었다. 화면을 통해서 보여지는 음식이 향을 전할 리 만무하지만 그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어디선가 나물을 무치는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나는 듯도 싶고 방금 한 하얀 쌀밥의 달큰한 냄새가 나는 듯도 하다. 그녀는 바로 식문화 연구원의‘한복선 원장’이다. 그녀에게 들어보는 우리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얼마나 깊은 맛을 내며 우리들의 가슴에 맛의 여운을 남기게 될지 궁금해진다.
음식에 대한 향수
오래될수록 좋은 것들이 있다. 바로 친구와 전통의 맛이다. 오래 사귄 벗과는 서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전통의 맛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랜 시간 숙성된 것들의 맛은 시간을 고스란히 맛 속에 각인시킨다. 한 입 물었을 때 오래된 것의 맛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혀를 감돈다. 그 느낌이 너무 좋아 한 입, 또 한 입 베어 물며 그 맛에 중독되고야 만다. 우리 전통의 음식들은 맛이 현란하지는 않지만 혀에 깊은 여운을 남긴다. 이 같은 여운을 가장 잘 표현하는 단어가‘감칠맛’이라고 볼 수 있다. 사전적으로‘음식을 먹은 뒤에까지 혀에 감기듯이 남는 맛깔스러운 뒷맛’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우리 전통의 음식에서는 은근함과 정성이라는 정서가 베어 나온다. 어린 시절 골목 어귀에서 아이들과 소꿉놀이를 하다가도 저녁시간이 되면 귀신같이 알아채곤 했다. 바로 골목길에 진동하던 음식 냄새들 때문이다. 구수한 된장찌개 냄새며, 은근한 불에 올려놓은 생선구이 냄새 등이 골목길을 채웠다. 지금도 길을 걷다가 음식냄새를 맡으면 그 음식과 함께 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르곤 한다. 음식에 대한 기억은 오래도록 사람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게 된다. 우리가 전통음식에 대하여 가지는 향수는 바로 우리의 의식 심연에 자리 잡고 있는 맛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좋은 음식은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들며 때로는 추억 속에 스며들어 인생의 한 부분을 떠올릴 때 음식의 향과 맛이 함께 기억나기도 한다는 것을. 음식을 만드는 사람은 재료를 선택하고 그것을 다듬고 레시피에 따라 요리를 만들어내는 모든 과정에서 그것을 먹으며 행복을 꿈꿀 이들을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어머니의 손길에는 항상 정성이 깃들어 있고 그 정성은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맛으로 느껴지곤 한다. 한복선과 궁중요리에 대하여 풀어놓기 전에 그녀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바로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조선왕조 궁중음식 전수자인 인간문화재 38호 황혜성 교수이다. 밥하고 반찬을 만드는 아녀자의 솜씨를 문화로 격상시킨 황혜성 교수. 정성스러운 손끝에서 빚어내는 음식들은 맛보는 이들로 하여금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음식문화는 모든 문화의 첫머리요, 우리 민족의 장신’이라는 신념으로 전통음식을 재현하며 그 명맥을 유지해왔던 것이다.
옛 것과 지금의 것 조화로움을 이루다
한복선을 비롯한 세 자매 모두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음식이라는 공 통의 운명을 짐 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현재 그녀의 딸 정라나 역시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삼 대를 이어가며 계속되는 그들의 궁중음식에 대한 이야기는 감동적이다. 만드는 이의 정성과 음식을 먹는 이에 대한 애정이 양념처럼 첨가되어 만들어지는 것이 음식이기에 가족이라는 코드와 잘 부합되어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진다. 한복선 원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음식을 항상 집안에서 함께 만드는 환경에서 살아왔다. 음식에 대한 특별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배우고 익힌 것이 음식 만들기였다.”때문에 훌륭한 어머니이자 스승을 만나게 된 것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음식의 존재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그 음식을 먹으며 행복한 미소를 짓게 될 사람일 것이다.“음식이란 내가 먹고자 하는 것보다 항시 상대를 배려하여 만들어지게 된다.”그래서일까. 음식을 하는 이들의 손길에는 항상 정성이 어려 있으며 음식을 먹는 이가 맛있게 먹어주는 것만으로 그들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감돈다. 그녀는 궁중요리는 기품 있는 음식이라고 설명한다. 동시에 한국의 정체성을 알리는 음식이다.“대한민국의 힘이 커지고, 세계화에 세련됨의 안목이 커지면 우리의 전통을 펼칠 수 있는 공간도 커지게 될 것이다. 음식은 큰 문화라고 했다. 각 나라마다 고유의 음식 문화가 존재하고 그것은 한 나라의 자랑스러운 문화가 된다.”하지만 옛 것과 지금의 것은 계속 달라지고 있다. 옛 것과 지금의 것을 조화롭게 하여 기품 있는 우리 맛을 전하고 싶다고 전했다. 음식과 함께 한 삶은 끊임없는 연구와 함께 계속 변화해가고 있다. 그 동안 음식을 만드는 것이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손을 놓지 않고 있다. 그 공부의 한 가운데 궁중음식이 있을 것이며 가정음식이나 의례음식, 사찰음식 등으로 꾸준히 확장해나가고 있는 중이다. 한복선 원장이 음식과 함께 해 온 세월은 어느덧 삼십 년이 지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음식과 함께 삶의 흔적을 만들어나가게 될 것이다. 우리네 전통음식과 함께 하는 그녀의 인생은 오래 숙성된 깊이를 더해갈 것이다.N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