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의 아픔을 갖고 있는 곳 중, 중동을 빼놓고 이야기 할 수 없다. 기독교와 이슬람세력 간의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고 “신의 이름”으로 행하여지는 모든 행위자체는 이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한다. 때문에 종교를 밑바탕으로 정치,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전쟁은 가장 비참하고 잔혹하다. 모든 행위를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지중해와 아시아를 잇는 교차점에 위치한 해안국가 레바논, 문화적 다양성과 교역의 중심지였지만. 그만큼 역사는 분쟁과 갈등으로 점철됐다.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레바논이 독립한 것은 1943년, 미완의 독립이었고 그로부터 3년 후 프랑스 군대가 철수했다.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직후 아랍-이스라엘 전쟁 때부터 레바논은 팔레스타인 난민의 집결지였고 아랍-이스라엘 갈등의 중심이 됐다. 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는 시리아와 이에 맞서는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가 레바논을 무대로 패권 다툼을 벌였다. 여기에 레바논 내 기독교와 이슬람 세력 간의 갈등은 1975년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불러왔고, 시리아의 개입과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이어졌다. 1992년 내전은 끝났지만 불안정은 계속됐고, 시리아군이 철수한 건 불과 지난해의 일이다. 레바논 내전은 종파간의 정치적,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분쟁이다. 우리의 충청북도만한 작은 나라이나 기독교와 이슬람 등 17개 종류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혼합되어 거주하고 있는 '종교 박물관'의 나라로도 불린다.
정치적 갈등의 배경
레바논은 마론파공동체, 그리이스정교공동체, 그리스가톨릭공동체, 아르메니아공동체, 수니파이슬람공동체, 시아파이슬람공동체, 드루즈공동체 등 다양한 집단들로 구성된 모자이크적 '조각 국가'로서 태생적으로 분쟁의 가능성을 안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들은 각각 고유의 특성과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나 크게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으로 구분된다. 이 두 세력은 레바논이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이후 상충된 정치관으로 대립하였다. 기독교 세력은 레바논주의(Lebanism)를 주창하면서 완전한 독립국가로서의 레바논을 건설하려 하였고, 이슬람 세력은 아랍주의(Arabism)를 주창하면서 레바논을 아랍세계의 일부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두 세력은 1943년 국민협정(National Pact)에 합의로 일단 갈등과 대립을 종식시키기에 이르렀다. 이 협정에 따라 대통령은 기독교 마론파, 수상은 이슬람 수니파, 국회의장은 이슬람 시아파에서 맡는 정부를 구성함으로서 레바논은 분열과 갈등의 가능성을 안고 출범하였다.
종교적 기반위의 최초 내전 발발
최초의 본격적 내전은 1958년 발생되었다. 이는 기독교 세력의 샤문 대통령이 서방에 접근하는 것에 대해 이슬람 세력이 반발하면서 촉발되었다. 당시 중동지역에서는 1952년의 이집트 낫셀 혁명과 1956년의 수에즈 전쟁 등에 자극 받아 민족주의운동이 고조되었는데,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샤문 대통령이 자신의 입지를 확보하고자 서방에 접근하자 이슬람 민족주의 세력이 반발한 것이다. 샤문 대통령은 1957년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추진한 지역방위 계획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자세를 보였고, 이러한 친 서방 정책은 불가피하게 아랍 민족주의 세력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더욱이 그는 1957년의 의회선거에서 기독교 진영의 확대를 노리면서 재선을 시도하였다. 이에 이슬람 세력은 국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1958년 5월 전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 반란은 1개월 후 수도 베이루트까지 파급되어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시가전으로 확대되었다. 내전 상황이 악화되자 샤문 대통령은 1958년 7월 15일 미국에게 개입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영국과 터키 주둔 병력 15,000 명을 베이루트에 상륙시켰다. 미국의 이러한 개입은 사태를 수습할 수 있었으나 아랍 여러 국가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당시 아랍연맹에 가입하고 있던 10개 국가는 유엔에 '중동평화결의안'을 제출하고 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미국은 각 종파간의 화해와 새로운 연립정권의 출범으로 내전이 진정된 후 1958년 10월 중순부터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하였다. 3개월간 계속된 내전의 사망자는 2,700명이고, 미군도 240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이스라엘, 레바논을 침공하다
레바논의 정치, 사회적 불안정은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유입해 들어와 베이루트와 남부지역에 난민캠프를 설치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은 1970년 9월 자국의 정치, 사회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던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추방하는 군사작전을 전개하였는데, 그 때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인접 레바논으로 피난하여 그 곳에서 대이스라엘 무장활동을 벌이게 된 것이다. 레바논의 집권 세력과 기독교 세력들에게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의 존재가 눈에 가시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기독교 우파 팔랑헤 당 민병들이 1975년 4월 베이루트 교외에서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탄 버스를 습격하여 27명을 사망케 하였다. 이로 인하여 레바논은 1976년 11월까지 내전에 휘말리게 되었다. 내전이 진행되는 동안 시리아 정규군이 사태 수습 명분으로 국경을 넘어 개입함으로서 상황은 제3국이 개입되는 양상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시리아의 군사개입은 또 다시 이스라엘의 개입을 가져왔다. 시리아의 개입에 불안을 느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게릴라의 텔아비브 습격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1978년 3월 레바논을 침공하여 3개월 동안 군대를 주둔시켰으며, 그 후에도 빈번하게 레바논 영내를 진입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확대되자 프랑스와 스웨덴 등 11개국 군대 6,000여 명이 유엔안보리의 결의에 따라 레바논 남부에 파견되었다. 더욱이 미국이 이스라엘과 기독교 우파를 지원하고 구소련이 시리아와 이슬람 좌파를 지원함으로서 레바논 내전은 국제화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처럼 레바논 내전은 기독교 민병대, 이슬람 민병대, 레바논 정부군, 시리아군, 이스라엘군이 접전을 벌이는 복잡한 국면을 맞게 되었고, 그 결과 내전으로 인해 15만명이상이 숨지는 비극을 겪어야만 했다.
계파간 무장세력과 이스라엘 충동
레바논 내 주요세력 주요세력 병력수 연계국가 거점지역 레바논 군 55,000 시리아 베이루트, 시리아 군 35,000 시리아 베이루트, 베카(Bekkaa)계곡 헤즈볼라 5,000-15,000 이 란 남부 레바논 아 말 3,000 미만 시리아 남부 레바논 남부레바논 군(SLA) 2,000 이스라엘 남부 레바논 진보사회당(Druez) 3,000 미만 시리아 남부 레바논 이란 혁명수비대 200 이 란 남부 레바논, 베카 계곡
이후 레바논의 각 계파 민병대와 정부군간의 내전은 약화되었으나 1993년부터 레바논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여러 세력간의 교전은 심화되었다. 동 교전의 주요 당사자는 이란의 지원을 받는 이슬람 반군세력인 헤즈볼라,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아말(Amal)게릴라, 이스라엘 정부군,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는 남부레바논군(South Lebanon Army) 등이다. 시리아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 정부는 사실상 레바논 남부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상실한 상태이다. 헤즈볼라와 아말은 남부 레바논의 이스라엘 국경지역에서 대이스라엘 박격포 공격 등을 주로 감행하고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전투기를 동원하여 게릴라 거점 지역을 폭격하는 형태의 충돌이 지속되었다.
이스라엘 철군과 ‘헤즈볼라’ 부각
2000년 3월 이스라엘은 레바논에서의 철군을 결정하고 5월 전격 단행했다. 교전지역에서 전쟁의 핵심당사자가 일방적으로 사라지자 지역은 권력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 지역을 거점으로 하던 헤즈볼라가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하였다. 레바논에서 일정한 세력을 유지하기 원하는 시리아는 이스라엘의 일방적 철군 시 발생할 권력 공백을 우려하여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때 일방적 철군을 반대한 바 있었다. 시리아의 우려대로 남부 레바논 지역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헤즈볼라 세력으로 대치되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시리아는 이란과의 경쟁관계로 인해 헤즈볼라를 대이스라엘 항전의 동지보다는 위협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실 시리아는 레바논을 프랑스 제국주의로 인해 빼앗긴 자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간주하고 있다. 한편, 2000년 5월 이스라엘군의 철군 이후 한 동안 공세를 중지하였던 헤즈볼라가 11월부터 대 이스라엘 공격을 재게 하였다. 이스라엘은 동 지역을 통제하고 있는 UN 평화유지군에게 헤즈볼라의 공격 중지를 요청하였으나 효과적인 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철군 이후 레바논 내에서는 시리아의 철군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었다. 거의 모든 계파가 시리아의 철군을 요구했고 계속 거부할 경우, 이들 세력 간의 새로운 무력 충돌의 징조도 보이고 있었다. 시리아는 이스라엘군의 주둔을 이유로 자국 군대의 레바논 주둔을 정당화하였으나 이스라엘이 철군한 이후 정당성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2001년 이후에도 이스라엘과 레바논 남부를 거점으로 하는 헤즈볼라 세력간에는 지속적인 충돌이 계속되었다. 특히,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Shebaa Farm 지역을 중심으로 교전했는데 동 지역은 8제곱마일 규모로 UN에 의해 시리아 영토로 지정되어 있으나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전면 충돌이었다기보다는 헤즈볼라의 간헐적인 치고 빠지는 공격과 이에 대한 이스라엘의 위협 공격의 형태를 보였다. 헤즈볼라는 주로 122mm 로켓포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Shebba Farm지역을 공격하고 이스라엘은 전투기, 포, 공격용 헬기를 동원하여 대응했으나 큰 사상자 없이 위협 차원에 그친 수준이었다. 다만 달라진 것은 이스라엘이 2000년 5월 남부 레바논에서 철수한 이후 헤즈볼라가 처음으로 이스라엘 영토를 공격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에 이스라엘은 헤즈볼라의 공격에 대해 강력 대응할 것임을 밝혔고 중단되지 않을 경우 시리아와 레바논을 향한 대규모의 공격이 있을 것임을 경고했다.NP